1부: 그날, 회의실 공기가 얼어붙었습니다
2019년 11월 어느 화요일 오후,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의 한 중견 소프트웨어 회사 회의실이었습니다. 직원 67명, 연매출 120억 원 규모의 이 회사 김 대표는 대기업 구매담당 임원 세 명과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옆에서 협상 자문 역할로 배석해 있었거든요.
대기업 측에서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김 대표님, 이번 프로젝트 규모가 꽤 큽니다. 저희도 여러 업체 만나보고 있는데, 대표님 쪽에서 먼저 가격 제안해 주시면 검토해 보겠습니다.”
제가 김 대표 쪽을 슬쩍 봤습니다. 눈빛으로 ‘기다리세요’라는 신호를 보냈는데, 김 대표는 이미 입을 열고 있더군요.
“저희가 내부적으로 검토해 봤는데요, 8억 5천 정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 순간, 대기업 측 임원 세 명이 서로 눈을 마주쳤습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저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잡았다’는 표정이었거든요. 회의는 그 이후로 김 대표가 원하는 방향으로 단 한 번도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최종 계약 금액은 6억 2천만 원. 김 대표가 처음 제시한 금액에서 무려 27%가 깎여나간 겁니다.
회의실을 나서면서 김 대표가 제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요? 저는 분명히 적정 가격을 불렀는데.” 저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표님, 왜 먼저 숫자를 말씀하셨습니까?”
2부: 대부분이 모르는 ‘먼저 말하기’의 함정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30년 전에는 똑같은 실수를 했습니다. 1994년, 제가 처음으로 독립 컨설턴트로 나섰을 때였거든요. 부산의 한 섬유회사 구조조정 프로젝트를 따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상대방이 “컨설팅 비용이 얼마나 될까요?”라고 물었을 때, 저는 망설임 없이 “2천만 원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회사는 이미 서울의 대형 컨설팅펌에서 8천만 원짜리 견적을 받아놓은 상태였더군요. 제가 스스로 제 가치를 4분의 1로 깎아버린 셈이었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가격을 먼저 말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총을 건네주고 “쏘세요”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걸요.
왜 사람들은 먼저 말하고 싶어 할까요?
심리학에서는 이걸 ‘불확실성 회피’라고 부릅니다. 침묵이 불편하니까, 빨리 숫자를 말해서 상황을 정리하고 싶은 거죠. 특히 한국 사업가들한테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더군요. “빨리빨리” 문화가 협상장에서도 작동하는 겁니다.
또 하나, 많은 분들이 “앵커링 효과”를 잘못 이해하고 계십니다. 먼저 높은 숫자를 부르면 그게 기준점이 되어서 유리하다는 이론 말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여기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시장 가격을 모를 때만 유효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현실에서 대부분의 B2B 협상은 상대방이 이미 시장 가격을 꿰뚫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기업 구매팀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갖고 있습니다. 경쟁사 견적, 원가 구조, 심지어 여러분 회사의 재무 상태까지 파악하고 들어옵니다. 이런 상황에서 먼저 가격을 부르면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의 숫자가 그들의 기대보다 낮으면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고 더 깎으려 들고, 높으면 “저 회사는 시장을 모르네” 하며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나갑니다.
어느 쪽이든 손해는 먼저 숫자를 부른 쪽이 보게 됩니다. 제가 30년간 현장에서 본 패턴이 정확히 이랬습니다.
3부: 그날 이후, 제가 실제로 바꾼 것들
테헤란로 회의실에서 참패를 겪은 김 대표와 저는 그날 밤 소주를 마시며 복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3개월 뒤 찾아온 다음 기회에서는 완전히 다른 전략을 썼습니다.
첫 번째: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2020년 2월, 또 다른 대기업과의 협상 자리였습니다. 상대방이 똑같이 “먼저 가격 제안해 주시죠”라고 했을 때, 김 대표는 제가 시킨 대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격을 말씀드리기 전에, 이번 프로젝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부분이 뭔지 먼저 여쭤봐도 될까요? 저희가 제안드리는 가격이 그 가치에 맞게 설계되어야 할 것 같아서요.”
이 한 마디로 협상의 주도권이 넘어왔습니다. 상대방은 자신들의 니즈를 20분간 설명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이 정말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납기 준수’와 ‘유지보수 대응 속도’라는 걸 파악했습니다. 가격보다 더 중요한 카드를 손에 쥔 겁니다.
두 번째: 범위를 제시했습니다
상대방의 니즈를 충분히 파악한 뒤, 저는 김 대표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했습니다.
“말씀하신 요구사항을 충족하려면, 비슷한 규모의 프로젝트들이 보통 7억에서 11억 사이에서 진행됩니다. 세부 스펙에 따라 달라지겠지만요. 혹시 이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계신 예산이 있으시면 공유해 주시겠습니까?”
이 전략의 핵심은 상대방이 먼저 구체적인 숫자를 말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습니다. 대기업 측 임원이 “저희 내부적으로는 9억 정도를 잡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한 겁니다.
세 번째: 가격이 아닌 가치로 협상했습니다
상대방의 예산을 확인한 뒤, 우리는 가격을 깎아달라는 요청에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9억에서 8억으로 낮추는 건 가능합니다. 대신 유지보수 대응 시간을 2시간에서 24시간으로 변경해야 합니다. 아까 유지보수 속도가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그 부분을 포기하실 수 있으신지요?”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최종 계약 금액 9억 3천만 원. 처음에 그들이 말한 9억보다 3천만 원 더 받았습니다. 김 대표는 3개월 전 27% 깎였던 것과 정반대의 경험을 한 겁니다. 그해 김 대표 회사의 영업이익률은 전년 대비 4.2% 포인트 상승했습니다. 단순히 한 건의 협상 기술 변화가 연간 실적 전체에 영향을 준 사례였습니다.
4부: 30년간 본 패턴, 그리고 진짜 원인
제가 30년간 수백 건의 협상을 자문하면서 발견한 패턴이 있습니다. 먼저 가격을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는 겁니다.
유형 1: 자신감 부족형
자신의 제품이나 서비스 가치를 스스로 믿지 못하는 대표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빨리 숫자를 말해서 “그래도 이 정도면 싸지 않냐”는 확인을 받고 싶어 합니다. 특히 창업 3년 미만의 스타트업 대표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더군요.
유형 2: 거절 공포형
“가격이 너무 높으면 아예 거래가 안 될까 봐”라는 두려움에 먼저 낮은 가격을 부르는 분들입니다. 이 유형은 특히 제조업 중소기업 대표님들 사이에서 많이 봤습니다. 대기업 납품 경험이 있는 분들일수록 이런 공포가 깊이 새겨져 있더군요. 과거에 “가격 안 맞으면 다른 데 갈게요”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유형 3: 정보 과잉형
반대로, 시장 정보를 너무 많이 알아서 문제인 경우도 있습니다. “경쟁사 A는 얼마에 하고, B는 얼마에 하니까 우리는 이 정도가 적당해”라고 스스로 가격을 정해버리는 거죠. 이런 분들은 자신의 차별화 포인트를 가격에 반영하지 못합니다. IT 서비스업에서 이 유형을 특히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형의 근본 원인을 파고들어 가면, 결국 하나로 귀결됩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하기 전에 내 이야기부터 하려는 조급함입니다. 협상은 대화입니다. 대화에서 상대방 말을 안 듣고 내 말만 하면 어떻게 됩니까? 관계가 망가지지요. 협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보다 서비스업에서 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제조업은 그래도 원가 구조가 명확하니까 “이 이하로는 못 한다”는 선이 있거든요. 서비스업은 원가 개념이 모호하다 보니, 협상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밀립니다. 제가 본 최악의 케이스는 인천의 한 물류 컨설팅 업체였는데, 첫 미팅에서 자기 견적의 60%까지 스스로 깎아버린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회사는 2년 뒤 문을 닫았습니다.
5부: 다음 협상장에 들어가기 전에
저는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께 딱 한 가지만 기억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협상장에서 침묵은 패배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가격 먼저 말씀해 주시죠”라고 할 때, 3초만 참으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혹시 이번 프로젝트에 책정하신 예산 범위가 있으신가요?” 이 한 마디가 수천만 원, 때로는 수억 원의 차이를 만듭니다.
제가 30년간 현장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협상에서 이기는 사람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들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먼저 말하고 싶은 충동, 빨리 끝내고 싶은 조급함, 거절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이 세 가지와 싸워서 이기시기 바랍니다.
다음 협상장에 들어가실 때, 입을 열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내가 지금 말하려는 이 숫자, 상대방의 니즈를 충분히 파악한 뒤에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그냥 불안해서 뱉어버리려는 것입니까?
여러분의 제품과 서비스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치 있습니다. 그 가치를 스스로 깎아내리지 마십시오. 가격은 당신이 아니라 상대방이 먼저 말하게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