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 인천 남동공단의 어느 회의실에서 들은 한마디
2019년 10월 어느 화요일 오후,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직원 45명 규모의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를 찾았습니다. 공장 2층 회의실 창문 너머로 프레스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더군요. 저를 부른 건 창업 18년 차 박 대표였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15년 동안 거래하던 도금 업체가 갑자기 문 닫았어요. 아무 예고도 없이. 지금 완제품 3만 개가 창고에 묶여 있는데, 도금 처리를 해줄 데가 없습니다. 이번 달 말까지 납품 못 하면 현대모비스 벤더 자격 박탈이에요.”
박 대표의 손이 떨리고 있었습니다. 담배를 물었다 뗐다 하면서, 계속해서 “15년인데, 15년인데”를 되뇌더라고요. 그 회사와 박 대표 사이에는 계약서 한 장 없었습니다. 구두로 “형님, 아우” 하며 지내온 15년이었거든요. 도금 업체 사장이 건강 문제로 갑자기 폐업을 결정했는데, 박 대표에게 연락이 온 건 폐업 일주일 전이었습니다. 저는 그날 회의실에서 네 시간을 앉아 있었습니다. 대체 협력사를 수소문하고, 급한 불부터 끄는 작업에 들어갔지만, 솔직히 그때 제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이건 도금 업체 잘못이 아니다. 이건 박 대표가 15년간 방치한 시한폭탄이었다.’
협력사는 ‘을’이 아니라 ‘동반자’라는 착각의 함정
많은 대표들이 협력사 관리에서 똑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 실수의 본질은 의외로 단순해요. 협력사를 ‘관리 대상’이 아니라 ‘알아서 해주는 존재’로 여긴다는 겁니다. 박 대표도 그랬어요. “우리가 15년 동안 일감 줬으니까 저쪽에서 알아서 잘해주겠지”라는 막연한 기대. 이게 협력사 관리 실패의 90%를 차지합니다.
저도 고백하자면, 컨설팅 초창기에 같은 실수를 했습니다. 1998년쯤이었을 겁니다. 제가 자문하던 경기도 안산의 금형 회사가 있었는데, 그 회사 협력사 리스트를 보고 “아, 거래처가 많으시네요. 안정적이시겠습니다”라고 말했거든요.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고, 저도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로부터 6개월 뒤, 주요 협력사 두 곳이 동시에 부도가 났습니다. 알고 보니 두 회사 모두 같은 모기업에 납품하다가 그 모기업이 망하면서 연쇄 도산한 거였어요. 제가 미리 협력사들의 재무 상태와 주요 거래처 의존도를 체크했더라면 막을 수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대부분이 오해하는 세 가지
첫째, “오래 거래했으니까 안전하다”는 착각입니다. 오래 거래했다는 건 그만큼 서로에 대한 점검을 게을리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그렇잖아요. 30년 지기 친구가 갑자기 연락 끊으면 더 당황스럽지 않습니까.
둘째, “단가만 잘 맞추면 된다”는 오해입니다. 단가 협상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면 정작 그 협력사가 우리 물량을 얼마나 우선순위에 두는지, 다른 곳에 더 좋은 조건으로 빠질 가능성은 없는지를 놓칩니다.
셋째, “대체할 곳은 얼마든지 있다”는 자만입니다. 특히 제조업에서 이 착각이 치명적입니다. 도금, 열처리, 특수 코팅 같은 공정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박 대표 경우에도 그 도금 업체는 특정 규격의 아연니켈 도금을 할 수 있는 인천 지역 유일한 곳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가 실제로 한 것들
박 대표 건은 급한 불부터 꺼야 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 바로 제 네트워크에 연락을 돌렸습니다. 다행히 경기도 시흥에 비슷한 규격의 도금이 가능한 업체를 찾았어요. 문제는 그 업체가 신규 거래를 꺼린다는 거였습니다. 저는 박 대표를 데리고 직접 시흥으로 갔습니다. 사장님을 만나 상황을 설명하고, 초기 3개월은 단가를 15% 높여서라도 물량을 받아달라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거래가 성사됐고, 박 대표 회사는 납기를 일주일 늦추는 선에서 현대모비스와 합의를 봤습니다. 벤더 자격은 유지됐어요.
급한 불을 끈 다음,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박 대표에게 한 달간 협력사 전수조사를 제안했습니다. 당시 그 회사가 거래하던 협력사는 총 12곳이었어요. 저는 각 협력사에 대해 다음 항목을 직접 조사했습니다.
- 최근 3년간 매출 추이와 주요 거래처 비중
- 대표자 연령과 후계 구도
- 주요 설비 노후화 정도
- 우리 회사 물량이 그 협력사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
- 동종 업종 내 대체 가능 업체 유무
결과가 충격적이었습니다. 12개 협력사 중 4곳의 대표가 65세 이상이었고, 그중 2곳은 후계자가 없었습니다. 1곳은 주요 설비가 20년 넘은 것이었고, 또 1곳은 우리 회사 물량 의존도가 70%가 넘어서 우리가 거래를 끊으면 바로 망할 상황이었어요. 반대로 말하면, 그 회사가 망하면 우리도 치명타를 입는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이 12개 협력사를 A, B, C 등급으로 나눴습니다. A등급은 당장 대체가 어렵고 리스크가 높은 곳, B등급은 대체 가능하지만 시간이 걸리는 곳, C등급은 언제든 교체 가능한 곳. 그리고 A등급 협력사 4곳에 대해서는 ‘백업 협력사’를 반드시 1곳 이상 확보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습니다. 6개월 뒤, 박 대표 회사는 A등급 4곳 모두에 대해 백업 업체를 확보했습니다. 실제로 이듬해 협력사 하나가 화재로 2개월간 조업 중단됐을 때, 백업 업체 덕분에 납기 차질 없이 넘겼습니다.
30년간 반복해서 목격한, 진짜 원인
협력사 관리 실패의 진짜 원인은 ‘바쁘다’는 핑계입니다. 대표들은 매출 올리고, 영업하고, 직원 관리하느라 협력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30년간 본 패턴은 명확합니다. 협력사 관리를 소홀히 한 회사는 결국 그보다 몇 배의 비용을 위기 대응에 쓰게 됩니다. 박 대표도 그 석 달 동안 새 협력사 찾고, 단가 협상하고, 납기 조정하느라 쓴 시간과 비용이 수천만 원어치였습니다.
업종별로, 대표 유형별로 다른 실수 패턴
제조업 대표들은 “기술만 좋으면 된다”며 협력사의 경영 상태를 안 봅니다. IT 서비스업 대표들은 “우리가 갑인데 뭘”이라며 협력사를 하청 취급합니다. 유통업 대표들은 “물류는 알아서 돌아간다”며 물류 협력사 점검을 안 합니다.
대표 유형별로도 다릅니다. 창업 1세대 대표들은 “의리”를 앞세우며 객관적 평가를 꺼립니다. 2세 승계 대표들은 반대로 너무 쉽게 협력사를 바꾸려다가 품질 문제를 일으킵니다. 전문경영인 대표들은 숫자만 보다가 현장의 암묵적 신뢰 관계를 무너뜨립니다.
결국 핵심은 균형입니다. 의리도 필요하고, 객관적 점검도 필요합니다. 오래 거래한 곳을 함부로 버리면 안 되지만, 오래 거래했다고 방심해서도 안 됩니다. 제가 수백 개 회사를 보며 내린 결론은 이겁니다. 협력사는 ‘관리’하는 게 아니라 ‘함께 리스크를 점검’하는 관계여야 한다. 일방적으로 점검당하는 느낌을 주면 협력사는 정보를 숨깁니다. 함께 리스크를 공유하고 대비하자는 자세로 다가가면, 협력사 쪽에서 먼저 위험 신호를 알려줍니다.
이 글을 읽는 대표님께 드리는 마지막 말씀
지금 당장 귀사의 협력사 리스트를 꺼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리스트에 있는 회사들 중, 대표 연세가 몇인지 아시는 곳이 몇 개나 됩니까? 후계 구도가 어떻게 되는지 아시는 곳은요? 그 회사들이 우리 말고 어디에 납품하는지, 그래서 우리 물량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파악하고 계십니까?
모른다면, 지금이 시작할 때입니다. 오늘 당장 협력사 한 곳에 전화해서 “사장님, 요즘 어떠세요? 밥 한번 먹으면서 이야기 좀 합시다”라고 말해보세요. 그 전화 한 통이 6개월 뒤, 1년 뒤 귀사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박 대표는 지금도 그 시흥 도금 업체 사장님과 분기에 한 번씩 골프를 친다고 합니다. 거래처가 아니라 동업자처럼 지낸다더군요. 그게 진짜 협력사 관리입니다. 계약서 들이밀고 단가 깎는 게 관리가 아닙니다.
귀사의 협력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 변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를 먼저 감지하는 회사와, 터지고 나서야 아는 회사. 대표님 회사는 어느 쪽이 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