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2월, 카이로 공항에서 만난 절박한 전화

새벽 4시 30분, 카이로 국제공항 제2터미널 도착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습니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였거든요. 경기도 안양에서 의료기기 부품을 제조하는 직원 47명 규모의 중소기업 대표님이었습니다.

“컨설턴트님, 지금 어디세요? 저 큰일 났어요. 이집트 현지 파트너사가 갑자기 계약 조건을 뒤집었습니다. 3개월 준비한 거래가 물거품 될 판이에요.”

저도 마침 이집트에 도착한 참이었습니다. 원래는 다른 클라이언트의 중동 시장 진출 프로젝트 때문에 온 출장이었는데, 세상에 이런 우연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대표님 회사도 이집트 카이로 근교 10월 6일 시티에 있는 제조업체와 협력을 추진 중이셨던 겁니다. 공항 로비 벤치에 캐리어를 세워두고 통화를 이어갔습니다. 대표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저는 시차로 몽롱한 머리를 억지로 깨우며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다 이집트까지 왔는데, 어쩌다 이런 전화를 받게 됐는지.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 일이 제게 중동 비즈니스의 본질을 다시 가르쳐줄 거라는 걸 말입니다.

대부분이 오해하는 것: “계약서가 있으니 괜찮겠지”

그 대표님은 6개월 전부터 철저하게 준비하셨습니다. 변호사를 통해 영문 계약서를 검토받았고, 현지 에이전트도 고용했으며, 심지어 아랍어 통역사까지 대동하고 두 차례나 카이로를 방문하셨더라고요. 서류상으로는 완벽했습니다. 그런데 왜 일이 터진 걸까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1990년대 후반에 똑같은 실수를 했습니다. 당시 저는 한 중견 섬유회사의 해외 진출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는데, 터키 이스탄불의 파트너사와 계약을 체결한 뒤 “이제 됐다”고 안심했거든요. 그런데 막상 물건이 도착하니 현지에서 갑자기 결제 조건 변경을 요구하더군요. 계약서에는 분명 선금 30%, 잔금 70%로 명시되어 있었는데, 그쪽에서는 “우리 관행은 다르다”면서 선금 10%만 지급하겠다고 버텼습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의 비즈니스 문화에서 계약서는 ‘시작점’이지 ‘종착점’이 아닙니다. 이걸 대부분의 한국 기업인들이 모릅니다. 우리는 도장 찍으면 끝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그쪽에서는 계약 체결 후에도 협상이 계속됩니다. 관계가 깊어지면 조건이 좋아지고, 관계가 틀어지면 계약서가 있어도 이행이 안 되는 거죠.

안양 대표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집트 파트너사 사장과 두 번 만났지만, 두 번 다 공식 회의실에서 통역사를 끼고 얘기했다고 하셨어요. 저녁 식사 한 번, 차 한 잔 나눈 적이 없었던 겁니다. 그쪽 입장에서는 “이 한국 사람이 우리와 진짜 오래 갈 사람인지 아직 모르겠다”고 느꼈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날 제가 실제로 한 세 가지

첫째, 직접 가서 얼굴을 보여드렸습니다

원래 제 일정은 기자 지구 근처에서 미팅이 잡혀 있었는데, 오전 일정을 양해 구하고 10월 6일 시티로 먼저 향했습니다. 대표님께는 “제가 대신 가서 상황 파악하겠습니다. 일단 아무 답변도 하지 마시고 기다리세요”라고 말씀드렸죠. 이집트 파트너사 공장에 도착한 건 오전 10시쯤이었습니다. 제가 불쑥 나타나니까 그쪽 사장님이 당황하시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아랍어로 “앗살라무 알라이쿰”이라고 인사하고, 준비해간 대추야자를 건네니까 표정이 풀리셨습니다.

둘째, 비즈니스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았습니다

처음 한 시간 동안 저는 계약 얘기를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분의 공장 설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구경시켜달라고 했고, 직원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청했습니다. 점심때가 되니까 그분이 먼저 “같이 밥 먹자”고 하시더군요. 카이로 시내의 현지 식당에서 코샤리와 구운 비둘기 요리를 함께 먹으면서 그분 가족 얘기, 이집트 경제 상황 얘기, 심지어 축구 얘기까지 나눴습니다. 그제야 그분이 본심을 꺼내셨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 회사가 우리를 1~2년 쓰다가 중국이나 베트남으로 가버릴까 봐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조건을 다시 논의하고 싶었던 겁니다.”

셋째, 장기 관계를 증명하는 ‘보증’을 제안했습니다

저는 서울의 대표님께 전화해서 이렇게 제안했습니다. “3년 최소 물량 보장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하시죠. 대신 그쪽에서도 단가 인상 동결을 2년간 약속받으세요.” 이집트 측에서는 “정말 3년을 함께할 생각이냐”고 재차 확인했고, 대표님이 직접 화상 통화로 “우리는 단기 거래가 아니라 장기 파트너십을 원한다”고 말씀하시니까 그제야 분위기가 확 바뀌더라고요. 그날 저녁, 수정된 계약서에 양측이 서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 회사는 2019년 하반기부터 이집트향 매출이 분기당 평균 18% 성장했고, 2021년에는 해당 거래선이 전체 수출 매출의 34%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30년간 반복된 패턴: 왜 해외 거래에서 똑같은 실패가 반복될까

제가 30년간 지켜본 바로는, 해외 비즈니스에서 실패하는 한국 기업의 80%가 동일한 패턴을 보입니다. 서류는 완벽하게 준비하는데, ‘관계 구축’에 투자하는 시간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특히 중동, 북아프리카, 동남아시아처럼 관계 중심 문화권에서 이 문제가 두드러지더군요.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체는 “품질만 좋으면 되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IT 서비스업체는 “온라인으로 다 되지 않나”라고 가볍게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표 유형별로 보면, 기술 출신 창업가일수록 관계보다 스펙에 집착하고, 영업 출신 대표님들은 오히려 관계 구축에 능숙하지만 계약 디테일에서 허점을 보이셨습니다.

진짜 원인은 ‘시간에 대한 인식 차이’입니다. 한국에서는 빠른 게 미덕이잖아요. “빨리빨리” 문화요. 하지만 이집트나 중동권에서는 급하게 구는 것 자체가 “저 사람 뭔가 숨기는 거 아냐?” 하는 의심을 부릅니다. 제가 만난 이집트 기업인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하셨어요. “한국 사람들은 왜 항상 서두르나요? 우리는 100년 된 피라미드 옆에서 사는 사람들인데요.”

그날 이후로 저는 해외 시장 진출 컨설팅을 할 때 반드시 ‘관계 구축 일정’을 별도로 잡습니다. 최소 2박 3일은 비즈니스 미팅 외에 순수하게 상대방과 시간을 보내는 일정으로 배정하라고 권합니다. 식사, 차 한 잔, 가능하면 상대방 가족과의 만남까지. 이게 돈 안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하지만 이 투자 없이 성공한 해외 프로젝트를 저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 해외 거래를 준비하고 계신 분께

계약서 파일 닫으시고, 잠깐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상대방 사장님 자녀가 몇 명인지 아십니까? 그분이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주말에 뭘 하시는지, 어떤 걱정을 안고 사시는지 아십니까? 모르신다면, 아직 계약할 준비가 안 된 겁니다.

저는 그날 카이로 공항에서 받은 새벽 전화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쩌다 이집트까지 갔는데, 어쩌다 남의 회사 일을 해결하게 됐는데, 그게 결국 제 컨설팅 인생에서 가장 값진 교훈 중 하나가 됐더라고요. 세상 일이 참 그렇습니다.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고, 예상 못한 곳에서 배움이 옵니다.

지금 책상 위에 있는 그 해외 계약서, 서명하기 전에 한 번만 더 물어보세요. “나는 저 사람과 10년을 함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 질문에 “예”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면, 비행기표 먼저 끊지 마시고 전화기부터 드세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안부를 묻고, 서두르지 않겠다는 신호를 보내세요. 계약서는 그다음입니다.

당신의 다음 해외 프로젝트, 정말 ‘어쩌다’ 성공하실 건가요, 아니면 ‘준비해서’ 성공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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