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새벽 6시 유후인역 앞에서 만난 안개

2019년 11월 셋째 주 토요일 새벽, 저는 후쿠오카 하카타역에서 유후인노모리 특급열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옆자리엔 부산에서 온 40대 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남편 되시는 분이 창밖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군요.

“유후인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사람들이 난리야. 그냥 시골 아니야?”

아내분이 남편 팔을 살짝 꼬집으며 “가보면 알아”라고 했습니다. 저도 솔직히 처음엔 그 남편분과 같은 생각이었거든요. 온천 마을이라면 벳푸가 더 유명하고, 자연경관이라면 아소산이 더 웅장하지 않나. 유후인이 대체 뭐길래 한국 사람들이 이토록 열광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열차가 유후인역에 도착했을 때,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역사 밖으로 나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건 마을 전체를 감싼 우유빛 안개였습니다. 멀리 유후다케 산이 안개 사이로 실루엣만 드러내고 있었고, 아침 햇살이 안개를 뚫고 들어오면서 마을 전체가 몽환적인 빛으로 물들었습니다. 그 부산 남편분도 저도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바라봤습니다. “아…” 하는 탄식만 나오더군요.

우리가 유후인에서 찾는 건 ‘관광지’가 아니었다

제가 30년간 기업 현장을 다니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정확히 모를 때가 많다는 거죠. “매출을 올리고 싶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직원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거였고, “회사를 키우고 싶다”고 하지만 정작 원하는 건 퇴근 후의 여유로운 저녁 시간이었던 사장님들을 수도 없이 봤습니다.

여행도 마찬가지더군요. 사람들은 “일본 감성”을 느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일본 감성”이 정확히 뭔지 물어보면 대부분 명확하게 대답을 못 하세요. 교토의 기모노? 도쿄의 네온사인? 오사카의 타코야끼 골목? 다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저도 처음 유후인에 갔을 때 같은 실수를 했습니다. 유명하다는 긴린코 호수 사진 찍고, 유후인 플로랄 빌리지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상이랑 인증샷 찍고, 롤케이크 사 먹고. 체크리스트 지우듯이 관광 명소를 돌아다녔습니다. 그러고 나서 숙소로 돌아와서 든 생각이 뭐였냐면요, “그래서 뭐?” 였습니다.

분명 예쁜 곳이었고, 맛있는 것도 먹었는데, 뭔가 허전했거든요.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은 많은데 마음에 남는 게 없었습니다. 그날 밤 료칸 노천탕에 홀로 앉아서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뭘 잘못한 거지?

답은 의외로 단순했습니다. 저는 유후인을 ‘소비’하러 갔지, ‘경험’하러 간 게 아니었던 겁니다. 명소를 수집하듯 돌아다니느라 정작 유후인이 주는 고요함, 느림, 여백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거죠. 우리가 말하는 “일본 감성”이란 결국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라, 일상에서 잃어버린 ‘느린 시간’을 되찾는 감각이었는데 말입니다.

두 번째 유후인에서 제가 실제로 한 것들

그래서 2023년 3월, 저는 유후인을 다시 찾았습니다. 이번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요. 첫 번째 규칙은 “일정을 반으로 줄인다”였습니다. 보통 당일치기로 유후인을 다녀오시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1박 2일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1박 2일 동안 딱 세 가지만 하기로 했습니다.

첫째, 새벽 긴린코 호수 산책

긴린코 호수는 낮에 가면 사람이 엄청 많습니다. 관광객들이 줄 서서 사진 찍고, 오리 밥 주고, 북적북적하죠. 그런데 새벽 6시 반에 가면 완전히 다른 세계가 펼쳐집니다. 호수 바닥에서 온천수가 올라오면서 수면 위로 안개가 피어오르거든요. 그 안개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치면 호수 전체가 금빛으로 반짝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이 호수를 ‘긴린코(金鱗湖)’, 즉 ‘금빛 비늘 호수’라고 부르는 이유를 그제야 알겠더군요. 저는 호숫가 벤치에 앉아서 40분을 그냥 멍하니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요. 그 40분이 제 유후인 여행에서 가장 값진 시간이었습니다.

둘째, 유노쓰보 거리를 세 번 걷기

유후인역에서 긴린코 호수까지 이어지는 유노쓰보 거리, 길이가 약 1.5킬로미터 됩니다. 대부분의 관광객은 이 거리를 한 번 왕복하면서 양옆 가게들을 훑어보고 끝내죠. 저는 이 거리를 세 번 걸었습니다. 처음엔 그냥 천천히 걸으면서 어떤 가게가 있는지만 봤습니다. 두 번째는 눈에 띄는 가게 서너 곳에 들어가서 주인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유후인 특산 유자 잼을 파는 가게 할머니는 이 마을에서 50년을 사셨다고 하더군요. 세 번째는 해질 무렵에 걸었는데, 같은 거리가 완전히 다른 분위기였습니다. 낮의 북적임이 사라지고, 가게마다 따뜻한 조명이 켜지면서 마치 지브리 애니메이션 속 마을 같았습니다.

셋째, 료칸에서 3시간 이상 머무르기

유후인에는 크고 작은 료칸과 온천이 80개가 넘습니다. 일본에서 벳푸 다음으로 온천수 용출량이 많은 지역이거든요. 저는 유후인 중심가에서 도보 15분 거리에 있는 객실 12개짜리 작은 료칸에 묵었습니다. 1박에 한화로 약 18만 원 정도 했는데, 저녁 가이세키 요리와 아침 식사가 포함된 가격이었습니다. 체크인하고 나서 바로 관광 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료칸 안에서 3시간을 보냈습니다. 객실에 딸린 작은 정원을 바라보며 녹차를 마시고, 노천탕에 두 번 들어가고, 유카타 입고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그 3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한 번도 안 봤습니다. 그게 가능했던 건 유후인이라는 공간이 주는 ‘느린 시간의 허락’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30년간 기업 현장에서 본 것과 유후인이 닮은 점

제가 컨설팅했던 기업들 중에 ‘빨리빨리 병’에 걸린 회사들이 유독 많았습니다. 경기도 수원의 직원 35명 규모 제조업체 대표님은 하루에 회의를 7개씩 잡으셨어요. 한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다음 회의로 뛰어가시고, 점심은 5분 만에 김밥으로 때우시고. 그렇게 10년을 달리셨는데, 회사 매출은 10년 전이랑 비슷했습니다. 왜였을까요? 방향을 점검할 시간 없이 속도만 냈기 때문입니다.

유후인 여행도 마찬가지더군요. 많은 분들이 당일치기로 후쿠오카에서 유후인까지 왕복하면서 “볼 건 다 봤다”고 생각하십니다. 하카타역에서 유후인까지 특급열차로 2시간 15분, 마을에서 4~5시간 돌아다니고, 다시 2시간 15분 타고 돌아오고. 하루 종일 이동과 관광에 쫓기다 보니 정작 유후인이 왜 좋은지를 느낄 틈이 없는 거죠.

제가 30년간 수백 개 기업을 보면서 발견한 패턴이 있습니다. 성과가 좋은 대표들은 ‘비우는 시간’을 확보합니다. 일부러 아무 일정도 안 잡는 오전을 만들고, 그 시간에 산책하거나 멍하니 창밖을 봅니다. 언뜻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그 여백에서 핵심적인 의사결정이 나오더군요. 유후인 여행도 똑같습니다. 명소를 많이 도는 게 좋은 여행이 아닙니다. 얼마나 깊이 그 공간에 스며드느냐가 여행의 질을 결정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유후인을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도쿄나 오사카 같은 대도시에서 바쁘게 사는 일본인들에게 유후인은 ‘시간이 느리게 가는 마을’로 인식됩니다. 실제로 유후인 관광협회 자료를 보면, 일본 내국인 관광객의 평균 체류 시간이 1박 2일 이상이래요. 반면 한국인 관광객의 70% 이상이 당일치기라고 합니다. 같은 장소를 가면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고 돌아오는 거죠.

유후인 여행, 이렇게 다시 계획해 보세요

제가 현장에서 기업을 살릴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습니다. 대표님께 “회사에서 가장 바쁜 하루 일과를 적어보세요”라고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 일과에서 “안 해도 되는 것”을 하나씩 지워나갑니다. 처음엔 다 필요하다고 우기시던 분들도, 지우고 나면 오히려 성과가 올라가는 걸 경험하십니다.

유후인 여행 계획도 같은 방식으로 접근해 보시길 권합니다. 일단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것 다 적어보세요. 그리고 그 목록에서 절반을 지우세요. 남은 것들만 천천히, 깊이 경험하시는 겁니다.

  • 긴린코 호수는 낮이 아니라 새벽이나 해질 무렵에 가세요. 같은 장소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줍니다.
  • 유노쓰보 거리의 가게들은 구경만 하지 말고, 주인과 한마디라도 나눠보세요. 번역 앱 켜고 일본어로 “이거 직접 만드셨어요?”라고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이 달라집니다.
  • 료칸에 묵으신다면, 체크인하고 최소 2시간은 밖에 나가지 마세요. 료칸 자체를 경험하는 시간을 확보하셔야 합니다.
  • 유후인노모리 열차는 그 자체로 관광입니다. 창가 좌석에 앉아서 바뀌는 풍경을 그냥 바라보세요. 스마트폰은 가방에 넣어두시고요.

제가 2023년 유후인에서 돌아온 뒤로 한 달에 한 번은 ‘유후인 같은 하루’를 만들어요. 일정을 비우고, 동네 공원을 천천히 걷고, 좋아하는 카페에서 두 시간을 보내고. 그 하루가 나머지 29일을 버티게 해주더군요. 유후인이 제게 가르쳐준 건 결국 이겁니다. 느린 시간은 사치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라는 것.

지금 당신에게 묻고 싶은 말

강연장에서 마지막으로 청중 분들께 종종 드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오늘 하루 중에 ‘아무것도 안 한 시간’이 얼마나 되셨나요?” 대부분 고개를 숙이십니다. 출근하고, 회의하고, 메일 쓰고, 퇴근하고, 저녁 먹고, 유튜브 보다가 잠들고. 그 사이에 ‘나’를 위한 고요한 시간은 없었던 거죠.

유후인은 그런 분들을 위한 마을입니다. 거창한 관광지가 아니에요. 세계적인 랜드마크도 없고, 스펙터클한 볼거리도 없습니다. 대신 그곳에 있으면 시간이 느리게 갑니다. 안개 낀 호수를 바라보고,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조용한 거리를 걷다 보면 어느새 서울에서 쌓였던 피로가 녹아내리는 걸 느끼실 겁니다.

다음 후쿠오카 여행 때, 유후인을 일정에 넣어보세요. 단, 당일치기 말고 1박으로요. 명소 체크리스트 지우지 마시고, 그냥 느긋하게 스며드세요. 그리고 돌아와서 저처럼 한 달에 하루쯤은 ‘유후인 같은 날’을 만들어보시는 건 어떨까요. 당신의 삶에도 안개 낀 새벽 호수 같은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Leave a comment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