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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에서 절대 먼저 가격을 말하면 안 되는 이유 (실제 실패 경험)

2014년 여름, 부산 해운대 근처의 한 중소 제조업체 회의실이었습니다. 에어컨도 제대로 안 틀어진 그 방에서, 40대 중반의 대표이사가 협상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있었습니다. 상대는 대기업 구매팀장. 정장을 빳빳하게 차려입은, 눈빛 하나에도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죠.

그 대표가 입을 열었습니다. 딱 30초도 안 됐어요. “저희는 개당 4,800원에 납품 가능합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매팀장이 메모지에 뭔가를 썼습니다. 저는 그 순간, 등골이 서늘했어요. 게임이 끝났구나, 싶었으니까요.

그 협상은 결국 개당 3,950원으로 마무리됐습니다. 대표는 나오면서 “그래도 계약은 땄잖아요”라고 했는데, 저는 그 말을 듣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땄긴 땄죠. 근데 그 가격으론 이익이 없었으니까요.


나도 한때 같은 실수를 했습니다

사실 저도 컨설턴트 초년생 시절에 똑같은 실수를 했거든요. 1990년대 초, 지금처럼 협상 이론이 널리 퍼지지도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저는 당시 한 중견기업의 외주 자문 역할로 처음 협상 테이블에 동행했습니다.

상대 회사 담당자가 “대략 어느 정도 예산으로 생각하고 계세요?”라고 묻자, 저는 아무 생각 없이 고객사 대표 대신 입을 열었습니다. “저희 쪽 기준으로는 3천만 원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 자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아세요?

상대방이 딱 이렇게 말하더군요. “아, 그 예산으로는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범위가 좀 제한적이에요.” 그러면서 스펙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먼저 숫자를 댄 순간, 상대방은 그 숫자를 천장으로 고정해버리고 그 안에서 최대한 조건을 유리하게 가져간 거죠.

그날 저녁 고객사 대표한테 된통 혼났습니다. “당신이 왜 거기서 말을 해요?” 맞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날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협상에서 입을 먼저 여는 건, 칼을 뽑기도 전에 자기 허리를 내어주는 것과 같다는 걸 그때 몸으로 배웠습니다.


“먼저 말하면 진다”는 게 왜 진리인가

협상 심리학에 ‘앵커링 효과(Anchoring Effect)’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근데 저는 책에서 이걸 배운 게 아니에요. 30년 동안 현장에서 수백 번 당하고, 또 수백 번 활용하면서 체득한 겁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먼저 숫자를 댄 쪽이 불리한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그 숫자가 기준점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5,000원”이라고 말하는 순간, 상대방의 뇌는 “5,000원짜리 물건”이라는 프레임을 박아버립니다. 그다음부터의 협상은 5,000원을 어떻게 깎느냐의 싸움이 되는 거죠.

반대로 상대방이 먼저 “이거 얼마예요?”라고 물어봐서 내가 “7,000원”이라고 했다면? 그 협상은 7,000원에서 시작하는 겁니다. 최종 합의가 6,200원이 되더라도, 우리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게임을 한 거예요.

2019년에 제가 자문했던 IT 솔루션 업체 이야기입니다. 그 회사는 제품 단가를 늘 “한 5,000만 원에서 협의 가능합니다”로 시작했어요. 그러면 고객이 어김없이 “4,000만 원으로 해주세요”라고 했고, 결국 4,200~4,300만 원 언저리에서 계약이 났습니다.

제가 그 회사에 딱 하나만 바꾸게 했습니다. 먼저 가격을 말하지 말 것. 대신 고객이 먼저 예산을 물어볼 때까지 기다리되, 그전에 충분히 가치를 설명하게 했죠. 그랬더니 6개월 만에 평균 계약 단가가 4,700만 원대로 올라갔습니다. 같은 제품, 같은 팀, 달라진 건 입을 여는 순서뿐이었습니다.


현장에서 제일 많이 보이는 실수 유형들

30년 동안 협상 현장을 다니면서 보니까, 먼저 가격을 말하는 실수에도 패턴이 있더라고요.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유형: “침묵이 불편해서” 말해버리는 경우

협상 자리에서 상대가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참 불안하죠. 그 침묵을 못 견디고 “저희가 대략 이 정도면 해드릴 수 있는데요…”라고 먼저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건 협상이 아니라 자백이에요. 상대방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만으로도 당신에게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겁니다.

저는 이런 사장님들한테 항상 이렇게 말합니다. “침묵은 당신 편입니다. 상대가 말 안 하면 당신도 말 마세요.” 침묵을 버티는 사람이 그 자리의 주도권을 잡습니다.

두 번째 유형: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착각

“우리가 먼저 솔직하게 가격을 제시해야 신뢰를 줄 수 있지 않나요?”라는 말,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건 협상이 아니라 구애예요. 비즈니스 협상에서 먼저 가격을 대는 건 성의가 아니라 약점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상대방은 당신의 ‘성의’를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그 정보를 협상 도구로 씁니다. 냉정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게 현실입니다.

세 번째 유형: “준비를 열심히 해서” 쏟아붓는 경우

이게 제일 안타깝습니다. 밤새 원가 계산하고, PPT 만들고, 단가표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서 첫 만남에 탁 꺼내놓는 거죠. 준비를 정말 열심히 한 건데, 그 준비가 오히려 독이 되는 겁니다.

그 단가표를 보는 순간 상대방 머릿속엔 이미 “이 숫자를 어떻게 낮출까”가 시작됩니다. 당신의 첫 미팅 목표는 가격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가격을 물어보도록 만드는 겁니다. 그 순서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 30년이 준 딱 세 가지 원칙

거창한 이론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제가 수백 개의 기업 협상 현장에서 직접 쓰고, 고객사 대표들한테 가르쳐서 효과를 확인한 방법들입니다.

  • ① 먼저 상대방의 예산을 물어라
    “혹시 이번 프로젝트에 책정하신 예산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 한 마디가 협상의 판을 뒤집습니다. 상대가 먼저 숫자를 대면, 이제 그 숫자가 기준점이 됩니다. 당신은 그 위에서 놀면 됩니다.
  • ② 가격 앞에 반드시 가치를 충분히 쌓아라
    가격은 맨 마지막에 말하는 겁니다. 그전에 “이걸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 “다른 고객사 사례”, “왜 우리여야 하는지”를 충분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가치를 먼저 쌓으면, 나중에 당신이 부르는 숫자가 ‘비싼 게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들립니다.
  • ③ 첫 숫자는 반드시 높게, 그리고 이유와 함께
    어쩔 수 없이 먼저 가격을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절대 타협된 가격을 처음부터 내놓지 마세요. 당신이 생각하는 최종 합의 희망 가격보다 20~30% 높은 숫자를 이유와 함께 제시하세요. “이 가격엔 이런 것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라는 설명이 있으면, 숫자가 아니라 가치를 놓고 협상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말

저는 강연장에서 이 얘기를 할 때마다 비슷한 반응을 봅니다. “그렇게 계속 안 말하면 상대방이 짜증 안 내나요?” “실제로 그게 가능한가요?”

가능합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먼저 “그래서 얼마예요?”라고 물어보게 만드는 게 진짜 협상의 시작입니다. 그 질문이 나왔다는 건, 상대가 이미 ‘사고 싶다’는 신호를 보낸 겁니다. 그때 말하는 가격과, 첫 만남에서 불안해서 꺼낸 가격은 협상력 자체가 다릅니다.

2014년 부산에서 그 계약을 따낸 대표는, 그 후로 제 말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가격을 마지막에 말하는 연습을 했고, 1년 뒤에는 같은 제품으로 평균 납품 단가를 11% 올렸습니다. 대단한 기술이 아닙니다. 입을 여는 순서를 바꾼 것뿐입니다.

당신은 지금 협상 테이블에서 누가 먼저 숫자를 꺼내고 있습니까? 혹시 아직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는 착각 속에서 첫 마디로 가격을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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