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 불 꺼진 사무실에서 발견한 것
2019년 11월 어느 금요일, 경기도 판교의 한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를 찾았습니다. 약속 시간은 저녁 7시였는데, 대표님이 급한 미팅이 생겨서 9시로 미뤄달라는 연락이 왔더군요. 별수 없이 근처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약속 장소인 회사 사무실로 올라갔습니다.
금요일 밤 9시. 당연히 텅 빈 사무실을 예상했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저는 멈춰 섰습니다. 직원 42명 중 30명 가까이가 자리에 앉아 일하고 있었거든요. 그것도 찡그린 얼굴이 아니라, 누군가는 웃으면서 동료와 대화하고, 누군가는 헤드폰을 끼고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아, 컨설턴트님 오셨어요? 저희 회사 좀 이상하죠? 퇴근하라고 해도 안 가요, 얘들이.”
박진우 대표(당시 41세)가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보통 저를 부르는 회사들은 직원들이 칼퇴근하고, 열정이 없고, 주인의식이 없다고 하소연하는 곳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회사는 정반대의 고민을 안고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너무 늦게까지 남아 있어서, 오히려 회사 이미지가 나빠질까 봐 걱정이라는 겁니다.
저는 그날 밤 11시까지 그 사무실에 남아 직원 7명과 개별 면담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30년 컨설팅 인생에서 품어왔던 고정관념 하나가 완전히 깨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야근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저도 한때는 야근을 단순하게 봤습니다. 야근이 많은 회사는 비효율적인 회사, 야근이 적은 회사는 효율적인 회사.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눴거든요. 1990년대 후반, 제가 처음 컨설팅 회사에 입사했을 때 선배에게 배운 공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동안 모든 회사에 똑같은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업무 프로세스 개선, 불필요한 회의 축소, 보고 체계 간소화.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효과가 있는 회사도 있었고요. 하지만 판교의 그 회사에서 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야근을 목격했습니다.
야근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더군요.
첫 번째는 ‘억지 야근’입니다. 상사 눈치 때문에, 일이 비효율적으로 돌아가서, 또는 야근을 해야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화 때문에 억지로 남아 있는 겁니다. 이런 야근은 회사도 망하게 하고 직원도 망하게 합니다. 제가 지난 30년간 정리한 수십 개 회사의 공통점 중 하나가 바로 이 억지 야근 문화였습니다.
두 번째는 ‘몰입 야근’입니다. 퇴근 시간이 됐는데,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또는 내일까지 끝내면 엄청난 성취감을 느낄 것 같아서, 스스로 선택해서 남는 겁니다. 이런 야근을 하는 직원들의 눈빛은 달라요. 피곤한 게 아니라 빛이 납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경영자들이 이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어떤 대표님은 직원들이 억지로 남아 있는 걸 보면서 “우리 회사 분위기 좋다”고 착각하고, 어떤 대표님은 자발적으로 몰입하는 직원들을 보면서 “저러다 번아웃 오면 어쩌지”라고 걱정합니다. 본질을 못 보는 거죠.
판교의 그 회사 직원들은 분명히 두 번째 유형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날 밤부터 6개월간 그 회사를 관찰하면서, 도대체 무엇이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남게 만드는지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회사가 실제로 한 세 가지
첫 번째: 일의 끝을 직원이 정하게 했습니다
박진우 대표가 회사를 인수한 건 2016년이었습니다. 그때 회사 상황은 최악이었어요. 연매출 8억 원에 적자가 2억 원씩 나고 있었고, 직원들 사기는 바닥이었습니다. 모두가 6시 정각에 퇴근했습니다. 일이 재미없으니까요.
박 대표가 제일 먼저 한 건 업무 할당 방식을 완전히 바꾼 것이었습니다. 기존에는 팀장이 “이거 화요일까지 해”라고 지시했습니다. 이제는 “이 기능 개발해야 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그리고 어디까지를 ‘완료’로 볼까?”라고 물었습니다.
미묘한 차이 같지만, 결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직원들이 자기 일에 대한 주인의식을 갖기 시작한 겁니다. “내가 말한 기한인데, 못 지키면 창피하잖아요.” 면담에서 한 개발자(4년 차)가 했던 말입니다. 스스로 정한 마감은 누가 시켜서 정해진 마감과 무게가 다르더군요.
두 번째: 성과를 숫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공유했습니다
매주 금요일 오후 4시, 이 회사에서는 ‘프라이데이 쇼케이스’라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자원자가 그 주에 자기가 한 일을 15분간 발표하는 자리입니다. 강제가 아니에요. 하고 싶은 사람만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매주 3~4명이 자원했습니다. 발표 내용도 단순한 업무 보고가 아니었어요. “이번 주에 제가 이 버그를 잡으려고 새벽 2시까지 삽질했는데요, 알고 보니 제가 작년에 짠 코드가 문제였어요. 과거의 저한테 욕하면서 고쳤습니다.” 이런 식의 솔직한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사람은 숫자로 인정받을 때보다 이야기로 인정받을 때 더 동기부여가 된다는 걸 그 회사에서 배웠습니다. “매출 15% 기여”보다 “김 대리가 밤새워서 우리 살렸다”는 동료들의 박수가 더 큰 힘이 되더라고요.
세 번째: 야근 자체를 금지하지 않되, 야근 이유를 물었습니다
박 대표는 8시 이후에 사무실에 남아 있는 직원에게 딱 한 가지를 물었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거, 하고 싶어서야 아니면 해야 해서야?”
“해야 해서요”라고 대답하면, 그 일을 왜 업무 시간 내에 못 끝냈는지 함께 분석했습니다. 업무량 문제인지, 프로세스 문제인지, 개인 역량 문제인지. 그리고 반드시 해결책을 같이 찾았습니다.
“하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하면, “그래, 재밌어? 그럼 내일 늦게 와”라고 말하며 다음 날 출근 시간을 자유롭게 해줬습니다. 자발적 몰입에는 보상을, 구조적 문제에는 해결을. 이게 그 회사의 원칙이었습니다.
결과가 어땠냐고요? 2016년 적자 2억이던 회사가 2019년에는 흑자 5억을 냈습니다. 직원 수는 18명에서 42명으로 늘었고, 퇴사율은 업계 평균의 절반 이하였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밤 9시에도 사무실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직원들이 스스로 선택해서요.
30년간 반복해서 본 패턴
이 회사를 보면서 저는 제가 그동안 만났던 수백 개 회사를 다시 떠올렸습니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몰입하는 회사에는 반드시 공통점이 있었거든요. 그리고 그 공통점은 대부분의 경영 서적에서 말하는 것과 조금 달랐습니다.
흔히 “돈을 많이 주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많더군요.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건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닙니다. 제가 봤던 회사 중에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주면서도 직원들이 6시 정각에 뛰쳐나가는 곳이 있었습니다. 서울 강남의 한 마케팅 대행사였는데, 연봉은 높았지만 대표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매번 묵살했거든요. 돈은 사람을 붙잡아두지만, 몰입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복지가 좋으면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죠.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산의 한 제조업체는 어린이집, 헬스장, 심지어 사내 카페까지 갖추고 있었는데, 직원들의 눈이 죽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에서는 10년을 일해도 자기 의견이 반영되는 일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30년간 관찰한 패턴의 핵심은 이겁니다. 직원이 자발적으로 몰입하는 회사는, 직원에게 ‘의미 있는 통제권’을 준 회사입니다. 내 일의 범위를 내가 정하고, 내 일의 완성도를 내가 판단하고, 내 일의 가치를 내가 설명할 수 있는 회사. 그런 곳에서 사람들은 시키지 않아도 밤늦게까지 남습니다.
업종별로 차이가 있긴 합니다. IT 업계처럼 창의성이 중요한 곳에서는 이런 문화가 더 빨리 정착되더군요. 반면 전통 제조업에서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었어요. 충남 천안의 한 자동차 부품 회사는 현장 작업자들에게 공정 개선 제안권을 주고, 채택된 제안에는 이름을 붙여줬습니다. ‘김철수 공법’, ‘박영희 라인’ 이런 식으로요. 그랬더니 작업자들이 스스로 야근하면서 더 나은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 유형별로도 다릅니다. 카리스마형 대표 밑에서는 이런 문화가 잘 안 생기더군요. 카리스마형 대표는 자기가 모든 걸 결정하고 싶어 하거든요. 직원에게 통제권을 주는 게 본능적으로 불안한 겁니다. 반면 겸손형 대표, 특히 “나는 잘 모르니까 너희가 알아서 해봐”라고 말할 수 있는 대표 밑에서는 이런 문화가 빠르게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 당장 해보실 한 가지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중에는 “그래서 우리 회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저도 그 마음 압니다. 저 역시 강연장에서 “좋은 얘기 들었는데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피드백을 수없이 받았거든요.
오늘 하나만 해보세요. 퇴근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남아 있는 직원이 있다면, 그 직원에게 가서 물어보세요. “지금 하는 일, 재밌어요?” 딱 그 한마디요.
그 직원의 대답을 잘 들어보세요. 눈빛을 잘 관찰해보세요. 재밌다고 하면서 눈이 빛나면, 그 직원은 당신 회사의 자산입니다. 그 직원이 왜 재미있어하는지 파악하고, 다른 직원들에게도 그런 경험을 줄 수 있는지 고민해보세요.
반대로 “그냥 해야 해서요”라고 하면서 눈을 피하면, 그건 경고 신호입니다. 그 직원은 곧 떠날지도 모릅니다. 아니, 이미 마음은 떠난 상태일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그 직원의 업무 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빨리 찾아야 합니다.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야근하는 회사는 마법이 아닙니다. 시스템입니다. 그리고 그 시스템의 시작은 대표가 직원에게 건네는 작은 질문 하나에서 출발합니다. 당신은 오늘, 당신의 직원에게 그 질문을 건넬 준비가 되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