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그날, 계약서는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2019년 11월 어느 화요일 오후, 서울 구로디지털단지 근처 한 사무실에서였습니다. 직원 47명 규모의 물류 소프트웨어 개발사 K사 대표님이 저를 급하게 불렀거든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습니다. 떨리는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대표님이 회의실 테이블 앞에 앉아 계셨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30페이지짜리 계약서가 펼쳐져 있었고, 상대방 회사 직인까지 찍힌 상태였더라고요. 그런데 표정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선생님, 8개월 공들인 거 아시잖아요. 연간 계약 12억짜리였어요. 근데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내부 사정으로 계약을 재검토해야 할 것 같다’래요. 재검토가 뭡니까, 그냥 안 하겠다는 거잖아요.”

대표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습니다. 8개월이면 짧은 시간이 아니거든요. 영업팀 3명이 매달렸고, 기술팀도 맞춤형 데모를 세 번이나 만들었고, 대표님 본인도 상대 회사 임원들과 골프를 네 번 쳤다고 했습니다. 모든 게 완벽했습니다. 상대방도 “이번 주 중으로 최종 서명하겠다”고 했었고요. 그런데 하루아침에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저는 그 계약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물었습니다. “대표님, 상대 회사에서 이 계약 진행하면서 한 번이라도 ‘걱정된다’거나 ‘확인이 필요하다’고 한 적 있으셨어요?” 대표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더군요. “없었는데요? 계속 긍정적이었어요.”

바로 그게 문제였습니다.

2부: 왜 ‘긍정적인 신호’가 오히려 위험한가

B2B 영업을 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착각하는 게 이겁니다. “상대가 긍정적이면 계약은 된 거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가 30년간 수백 건의 영업 사례를 봐왔는데, 계약 직전에 깨지는 건의 70% 이상이 ‘긍정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된 것들이었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컨설턴트 초창기에 똑같은 실수를 했습니다. 1998년도였을 겁니다. 부산의 한 조선 부품 회사를 컨설팅하면서 대형 조선사와의 납품 계약을 도왔거든요. 미팅 때마다 상대측 구매팀장이 웃으면서 “이거 좋네요”, “우리도 이런 거 필요했어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종 승인 단계에서 갑자기 연락이 끊겼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구매팀장은 결정권자가 아니었더라고요. 실제 결정권자인 구매본부장은 우리 회사 이름조차 제대로 몰랐습니다. 그분은 경쟁사와 이미 10년 넘게 거래해온 관계였고, 바꿀 생각이 애초에 없었던 겁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깨달았습니다. B2B 영업에서 ‘긍정적인 반응’은 데이터가 아니라 감정이라는 것을. 실무자가 좋다고 해도, 결정권자가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결정권자가 동의해도, 재무팀에서 예산을 막으면 끝입니다. 재무팀이 승인해도, CEO가 갑자기 “올해는 투자 자제”라고 하면 다 무너집니다.

K사 대표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8개월 동안 만난 사람은 상대 회사의 IT팀장과 실무진이었거든요. 그분들은 진심으로 K사 솔루션이 좋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최종 결정권자인 CFO를 단 한 번도 만나지 않았습니다. CFO는 그 사이에 회사의 현금 흐름이 악화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신규 투자를 전부 동결시켰던 겁니다.

3부: 그날 이후 제가 실제로 한 것들

첫 번째, 의사결정 지도를 그렸습니다

K사 대표님과 함께 화이트보드 앞에 섰습니다. 상대 회사의 의사결정 구조를 처음부터 다시 그렸거든요. IT팀장 위에 누가 있는지, 그 사람은 누구 말을 듣는지, 예산 승인은 어디서 나는지. 한 시간 동안 그리고 보니 우리가 접촉한 사람은 의사결정 라인의 가장 아래쪽에 있었더라고요.

저는 대표님께 말씀드렸습니다. “이 계약 살리려면 CFO를 만나셔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만나기 어려우면 우회로를 찾아야 해요.” 대표님이 수소문해보니 CFO가 같은 대학 경영대학원 출신이었습니다. 동문 선배 한 분을 통해 점심 자리를 만들었고, 대표님이 직접 갔습니다.

두 번째, 상대의 진짜 고민을 파악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CFO가 한 말이 핵심이었습니다. “솔루션은 좋은 것 같은데, 지금 현금이 빠듯해서요. 초기 비용이 부담됩니다.” K사 대표님은 그날 저녁 저한테 전화해서 이 얘기를 전해줬습니다. 저는 바로 말씀드렸습니다. “대표님, 가격을 깎으시면 안 됩니다. 대신 지불 구조를 바꾸세요.”

기존 계약은 계약 시점에 60%, 도입 완료 후 40%를 받는 구조였거든요. 저는 이걸 월 구독형 + 성과 연동 모델로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초기 비용을 20%로 낮추고, 나머지는 24개월 분할로 받되, 물류비 절감액의 일정 비율을 성과 보너스로 받는 구조였습니다.

세 번째, 리스크를 먼저 언급했습니다

두 번째 미팅에서 K사 대표님이 먼저 이렇게 말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솔루션이 귀사 환경에 100% 맞는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3개월 파일럿 기간을 드리겠습니다. 그 기간 동안 목표했던 물류비 15% 절감이 안 되면 계약을 무효로 하셔도 됩니다.”

CFO가 놀라더라고요. 보통 영업하러 온 사람들은 자기 제품 단점을 절대 말 안 하거든요. 근데 먼저 리스크를 언급하고 해결책까지 제시하니까 신뢰가 생긴 겁니다. 그 자리에서 CFO가 “이 정도면 검토해볼 만하겠네요”라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계약은 두 달 뒤에 다시 성사됐습니다. 금액은 처음 12억에서 9억으로 줄었지만, 파일럿 기간 동안 실제로 물류비 18% 절감을 달성했고, 다음 해에 연간 유지보수 계약 4억이 추가로 붙었습니다. 총 매출로 보면 오히려 더 커진 셈이었습니다.

4부: 계약이 깨지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30년간 B2B 영업 현장을 보면서 느낀 게 있습니다. 계약이 깨지는 이유는 대부분 ‘마지막’에 있는 게 아니라 ‘처음’에 있더라고요. 시작할 때 이미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데, 그걸 모르고 8개월, 10개월을 달리다가 마지막에 벽을 만나는 겁니다.

패턴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패턴 1: 결정권자를 착각한다. 실무자와만 이야기하면서 “담당자가 좋아한다”고 착각합니다. 제조업은 특히 이 함정에 빠지기 쉽거든요. 공장장이 OK 해도 본사 구매팀장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으면 끝입니다.
  • 패턴 2: 예산 사이클을 무시한다. 대기업은 보통 9~10월에 다음 해 예산을 확정합니다. 11월에 아무리 좋은 제안을 해도 예산이 없으면 못 사요. IT 서비스 회사들이 이 실수를 많이 하더군요.
  • 패턴 3: 경쟁사를 과소평가한다. “우리 기술이 더 좋으니까 당연히 선택받겠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B2B에서는 기술보다 관계가 먼저인 경우가 많습니다. 10년 거래해온 업체를 바꾸는 건 엄청난 리스크 부담이거든요.
  • 패턴 4: ‘안 된다’는 신호를 못 읽는다. 상대가 “좀 더 검토해보겠습니다”, “내부적으로 논의가 필요합니다”라고 하면 그건 긍정이 아니라 거절의 완곡한 표현일 때가 많습니다.

업종별로 차이도 있습니다. 금융권은 컴플라이언스 이슈로 갑자기 계약이 멈추는 경우가 많고, 제조업은 원자재 가격 변동에 민감해서 분기 실적에 따라 투자 계획이 급변합니다. 스타트업 대상 영업은 또 다릅니다. 의사결정은 빠른데, 다음 달에 회사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리스크가 있거든요.

대표 유형별로도 다릅니다. 숫자에 강한 대표님들은 ROI 계산서 하나로 결정하시는데, 관계 중심 대표님들은 “이 사람 믿을 만한가”를 더 중요하게 보시거든요. 상대 회사 대표님이 어떤 타입인지 파악 못 하면 아무리 좋은 제안서도 소용없습니다.

5부: 지금 계약 앞에 두고 계신 분께 드리는 말씀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분 중에 “거의 다 됐다”고 생각하는 계약이 있으실 겁니다. 상대가 긍정적이고, 실무 협의도 끝났고, 계약서 검토만 남았다고 느끼실 수 있어요.

제가 하나만 여쭤보겠습니다. 지금 그 계약의 최종 결정권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아십니까? 그분을 직접 만나보셨습니까? 그분이 이 계약에 대해 어떤 우려를 갖고 있는지 들어보셨습니까?

만약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 못 하신다면, 지금 당장 확인하셔야 합니다. 계약서에 도장 찍히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확정된 게 없습니다. 8개월 공들인 게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걸 저는 너무 많이 봐왔거든요.

오늘 당장 전화기 드세요. 실무자 말고, 결정권자에게 연락하세요. “혹시 이 계약 진행하시면서 걱정되시는 부분 없으신가요?”라고 직접 물어보세요. 그 한 통화가 8개월을 살릴 수도 있고, 아니면 문제를 미리 파악해서 다음 기회를 준비할 수도 있습니다.

영업은 물건을 파는 게 아닙니다. 상대의 불안을 해소해주는 겁니다. 그 불안이 뭔지 모르면서 어떻게 계약을 따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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