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2019년 3월, 인천 남동공단의 그 사무실
2019년 3월 둘째 주 화요일 오후 3시, 인천 남동공단 내 금속 가공 업체 사무실이었습니다. 직원 47명, 연매출 82억 원의 중견 제조업체였거든요. 저는 그날 대표이사 박 사장님의 긴급 요청으로 그곳을 방문했습니다.
“선생님, 저 미치겠습니다. 작년까지 잘 나가던 회사가 6개월 만에 이 꼴이 됐어요. 거래처 세 군데가 끊겼고, 직원들 사이에 소송 얘기까지 나오고 있어요.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박 사장님 얼굴에는 잠을 못 잔 흔적이 역력했습니다. 책상 위에는 커피잔이 네 개나 놓여 있었고,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더군요. 15년간 회사를 키워온 분이 저렇게 무너져 있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저는 일단 현장을 둘러봤습니다. 생산 라인은 돌아가고 있었고, 설비도 문제없어 보였어요. 재무제표를 훑어봐도 급격한 자금 유출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실 분위기가 이상했습니다. 직원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더라고요. 점심시간인데도 함께 밥 먹으러 가는 사람이 없었고, 회의실에서는 누군가 큰 소리로 통화하는 소리만 울려 퍼졌습니다.
저는 박 사장님께 물었습니다. “혹시 지난 1년 사이에 새로 들어온 관리직 직원 있으세요?” 그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네, 작년 9월에 기획팀장을 한 명 뽑았는데요. 대기업 출신이라 기대가 컸습니다.”
그 순간, 30년 경력에서 나오는 직감이 작동했습니다. “그 사람 좀 만나봐도 될까요?”
2부: 회사를 망가뜨리는 사람의 정체
모두가 오해하는 것
사람들은 회사를 망하게 하는 직원이라고 하면 대개 이런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횡령을 저지르는 회계 담당자, 기술을 빼돌리는 연구원, 대놓고 근무 태만을 부리는 불량 직원. 그런데 제가 30년간 수백 개 기업을 진단하면서 깨달은 건 전혀 다른 사실이었습니다.
진짜 회사를 망하게 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회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메일을 가장 많이 보내고, 야근도 자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엔 회사에서 가장 헌신적인 직원이에요. 그래서 대표도, 동료도, 심지어 본인조차 자신이 회사를 망가뜨리고 있다는 걸 모릅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도 컨설턴트 초창기에 이걸 몰랐습니다. 1997년, 제가 서른두 살 때 부산의 한 섬유회사를 맡았는데요. 그때 저는 재무구조만 들여다봤습니다. 숫자만 맞추면 회사가 살아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제가 떠난 지 8개월 만에 그 회사는 부도가 났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가 있는 동안에도 생산관리 팀장이 매일 아침 조회에서 “품질을 위해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주장하며 납기를 계속 지연시키고 있었더라고요. 저는 그걸 ‘책임감 있는 태도’라고 오해했습니다.
인천 그 회사의 기획팀장
다시 인천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그 기획팀장을 면담했습니다. 40대 초반, 말쑥한 외모에 대기업 특유의 세련된 언어를 구사했습니다. 그는 회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냈고, 개선안까지 제시했습니다. 언뜻 보기엔 완벽한 인재였어요.
그런데 저는 그의 지난 6개월간 업무 기록을 요청했습니다. 회의록, 이메일, 결재 서류를 전부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 모든 신규 프로젝트에 “리스크 검토가 필요하다”며 최소 2주씩 지연
- 거래처 미팅 후 항상 “조건 재검토” 의견서 제출
- 부서 간 협업 안건마다 “역할 분담 명확화” 회의 요청
- 모든 의사결정에 전체 참조 메일로 “우려 사항” 공유
개별적으로 보면 모두 합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6개월간 쌓이니까 어떻게 됐을까요? 신규 거래처 계약 체결까지 평균 기간이 3주에서 11주로 늘어났습니다. 내부 프로젝트 착수까지 걸리는 시간이 2배가 됐고요. 직원들 사이에서는 “뭘 해도 태클 걸린다”는 패배감이 퍼졌습니다. 실적이 좋던 영업사원 두 명이 퇴사했고, 거래처 세 곳이 “의사결정이 너무 느리다”며 경쟁사로 갔습니다.
3부: 그날 제가 실제로 한 것들
첫째 주: 데이터 수집과 패턴 분석
저는 먼저 지난 1년간의 모든 회의록을 출력하게 했습니다. A4 용지로 847장이었습니다. 그리고 형광펜 다섯 색깔로 분류했습니다. 노란색은 ‘결정된 사항’, 주황색은 ‘보류된 사항’, 빨간색은 ‘번복된 사항’, 파란색은 ‘신규 제안’, 초록색은 ‘완료된 사항’. 이 작업에 사흘이 걸렸습니다.
결과가 충격적이었습니다. 기획팀장 부임 전 6개월간 회의에서 ‘보류’된 안건은 전체의 12%였습니다. 그런데 부임 후 6개월간은 41%로 뛰었더라고요. ‘번복된 사항’은 8%에서 27%로 증가했습니다. 반면 ‘완료된 사항’은 67%에서 34%로 반 토막이 났습니다.
둘째 주: 개입 설계
저는 박 사장님께 데이터를 보여드리며 말씀드렸습니다. “사장님, 이 사람을 해고하시면 안 됩니다.” 박 사장님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저는 이어서 설명했습니다. “이 사람을 자르면 비슷한 사람이 또 들어옵니다. 시스템을 바꿔야 합니다.”
제가 설계한 개입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회의 규칙 변경. 모든 회의에서 “보류” 결정을 내릴 경우, 보류를 주장한 사람이 24시간 내에 대안을 서면으로 제출해야 한다는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대안 없이 보류만 시키는 걸 구조적으로 막은 겁니다.
둘째, 의사결정 데드라인 도입. 1천만 원 이하 안건은 48시간, 5천만 원 이하는 1주일, 그 이상은 2주일 내 결정하도록 했습니다. 기한을 넘기면 해당 안건의 기본 옵션이 자동 승인되는 구조였습니다.
셋째, 전체 참조 메일 제한. 전체 참조 메일은 반드시 사장님 사전 승인을 받게 했습니다. “정보 공유”라는 명목으로 조직 전체에 불안감을 퍼뜨리는 걸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셋째 주부터 넷째 주: 실행과 모니터링
새 규칙이 도입되자 기획팀장의 행동이 눈에 띄게 바뀌었습니다. 처음 일주일은 대안 서면 제출에 매달렸습니다. 그런데 대안을 제시하려면 실제로 일을 해야 하거든요. 그의 “우려 사항 제기” 빈도가 주 7회에서 주 2회로 줄었습니다.
결과는 3개월 뒤에 나타났습니다. 신규 계약 체결까지 평균 기간이 11주에서 4주로 단축됐습니다. 퇴사했던 영업사원 중 한 명이 “회사 분위기가 바뀌었다더라”며 복귀 의사를 밝혔고요. 4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3% 회복됐습니다. 그리고 기획팀장은 다섯 달 뒤에 스스로 퇴사했습니다. 그의 무기였던 “신중함”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환경이 된 거죠.
4부: 이 문제의 진짜 뿌리
30년간 반복해서 본 패턴
제가 이 유형의 “조용한 파괴자”를 처음 인식한 건 2003년이었습니다. 그 뒤로 20년간 비슷한 케이스를 최소 스물세 번 봤습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경력 중간에 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대기업에서 프로젝트 실패로 좌천됐거나, 창업했다가 망했거나, 책임지고 추진한 일이 크게 잘못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 트라우마가 “일단 막고 보자”는 행동 양식으로 굳어진 겁니다. 본인은 회사를 지키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회사의 동맥을 막고 있는 거죠.
업종별 차이
이 문제가 가장 치명적인 업종은 영업 중심 회사입니다. 유통, 무역, 서비스업 같은 곳이요. 의사결정 속도가 곧 경쟁력인데, 그게 느려지면 바로 매출에 타격이 옵니다. 반면 연구개발 중심 회사에서는 이런 사람이 오히려 “꼼꼼한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합니다.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기까지 훨씬 오래 걸리거든요.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대표 유형별 차이
이런 직원에게 가장 취약한 대표 유형이 있습니다. 바로 “기술자 출신 대표”입니다. 기술에는 자신 있지만 사람 관리에 자신이 없어서, 말 잘하고 논리적인 직원에게 쉽게 설득당합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이유가 있겠지” 하면서요. 반대로 영업 출신 대표는 이런 사람을 비교적 빨리 알아챕니다. 속도의 가치를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죠.
그리고 한 가지 더. 이런 “조용한 파괴자”는 혼자 오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자리를 잡으면 비슷한 성향의 사람을 추천해서 데려옵니다. “검증된 사람”이라면서요. 저는 이걸 “방해의 연쇄”라고 부릅니다. 한 명을 놓치면 두 명, 세 명으로 번집니다.
5부: 지금 당장 확인하셔야 합니다
제가 강연장에서 사장님들께 자주 드리는 질문이 있습니다. “지난달 회의에서 보류된 안건이 몇 개입니까?” 대부분 대답을 못 하십니다. 그런데 그 숫자를 모르면서 회사를 경영하고 계신 겁니다.
오늘 사무실에 들어가시면 딱 한 가지만 해보십시오. 지난 3개월간 회의록을 꺼내서, “보류”와 “재검토”라는 단어가 몇 번 나오는지 세어보십시오. 그리고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누가 발언했는지 확인하십시오. 특정 이름이 반복해서 나온다면, 그 사람이 회사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셔야 합니다.
저는 30년간 수많은 회사가 망하는 걸 봤습니다. 그중 외부 요인으로 망한 회사는 30%도 안 됩니다. 나머지 70%는 내부에서 서서히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그 무너짐의 시작점에는 거의 항상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 회사에도 그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안에 확인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인천의 박 사장님처럼 6개월 뒤에 저를 부르시겠습니까!